
‘중국 김치’가 ‘일본 김치’로 둔갑… 세계 무대에서 벌어지는 ‘김치 정체성 침탈’
최근 독일 초대형 마트 체인 알디(ALDI) 가 자사 홈페이지에 김치를 ‘일본 김치(Japanisches Kimchi)’로 표기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불과 2년 전 ‘중국 김치(Original aus China)’라는 표기로 지적을 받았던 같은 기업이 이번에는 ‘일본 김치’로 이름을 바꿔 다시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단순한 상품명 오류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중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문화 정체성 전쟁’의 한 단면이 숨어 있다.
알디는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유통기업으로, 프랑스·스페인·덴마크 등 유럽 전역에 지점을 두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기업이 김치를 ‘일본식 김치’로 표기했다는 것은 단순한 착오로 보기 어렵다.
2년 전 “중국에서 기원한 김치”라는 문구를 사용해 거센 항의를 받았던 알디는, 이후 ‘중국 김치’ 표기를 삭제했지만 이번에는 일본을 새롭게 끌어들였다. 즉, 한국의 전통음식을 아시아의 특정 국가 문화 속으로 흡수·혼합시키는 흐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독일 현지 한인들과 함께 항의 메일을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지만, 유럽 소비자들은 이미 ‘김치 = 아시아 발효채소’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며 경각심을 촉구했다. 이는 문화 정체성의 문제를 넘어, 한국이 주도적으로 구축해 온 ‘K-푸드 브랜드 가치’가 훼손될 수 있는 위험 신호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 배경에는 중국의 지속적인 ‘김치 원조국’ 주장과 문화 공세가 자리하고 있다. 2020년 이후 중국은 자국의 절임채소 ‘파오차이(泡菜)’를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등재시키며 “김치는 중국 음식”이라는 선전전을 펼쳐왔다. 이 전략은 단순한 식문화 논쟁이 아니라, 국가 이미지·관광 산업·식품 수출을 포함한 문화경제 전쟁의 일환이다.
중국은 유럽 내 대형 마트와 레스토랑 체인에 ‘중국 김치’ OEM 상품을 대량 공급하며, 유럽 소비자들의 인식 속에서 ‘김치=중국식 발효음식’이라는 인상을 강화하고 있다. 실제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는 중국산 절임채소가 “KIMCHI”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으며, 제품 포장에는 ‘Made in China’ 대신 ‘Asian Style’이라는 모호한 문구가 적혀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결과적으로 한국 김치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K-푸드’의 글로벌 신뢰도를 흔드는 전략적 침투로 해석된다.
중국의 직접적인 공세와 달리, 일본은 ‘간접적 브랜드 포지셔닝 전략’을 통해 김치 시장에 접근하고 있다. 일본 내 식품 대기업들은 오래전부터 ‘김치’를 일본식 입맛에 맞게 변형해 상품화했고, 이를 “J-Kimchi(일본식 김치)”로 수출해왔다. 일본식 김치는 단맛이 강하고 매운맛이 약해 서양인 입맛에 맞춘 제품이 많다.
이러한 제품들이 유럽 대형 유통망을 통해 공급되면서, 현지 소비자들은 “일본이 김치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로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 즉, 일본은 직접 김치의 기원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김치의 현대화’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것이다. 알디의 ‘일본 김치’ 표기 역시 이런 문화 흐름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문화 전쟁의 본질은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더 은밀하다. 한 나라의 문화 상징이 다른 나라의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 그 국가는 세계 무대에서 ‘상징적 발언권’을 잃는다.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기후·정서가 응축된 문화 유산이다.
그러나 지금 유럽의 소비자는 “김치는 아시아의 일반적인 절임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거대한 식품 수출망과 일본의 고급 식문화 마케팅이 있다. 한국의 정체성이 약화될수록, 글로벌 시장에서 ‘K-푸드’의 브랜드 가치는 분산되고 결국 한류의 확장력도 제한된다.
문화는 국가의 경제력과 직결된다. 김치의 원산지 혼란은 단순한 표기 오류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경제 생태계를 흔드는 전략적 도전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교민과 한류 지지자들의 역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독일 내 한인 커뮤니티는 즉각 항의 서한을 발송하고 SNS를 통해 알디 측의 부적절한 표기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민간 대응은 정부 차원의 협의보다 빠르고 유연하다. 그러나 지속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정부·민간·학계가 협력하는 ‘문화표기 감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와 외교부는 김치·한복·한글 등 한국의 대표 문화자산에 대한 국제 브랜드 관리 전략을 체계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브랜드 데이터베이스(National Brand Database)’를 구축하고, 해외 유통사에 대한 원산지 모니터링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김치 표기의 오류는 사소해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세계인의 인식에 깊이 각인된다. 일본은 이미 ‘스시’와 ‘라멘’을 세계 식문화의 보편어로 만들었고, 중국은 ‘딤섬’과 ‘중화요리’를 국제 미식 표준으로 끌어올렸다. 그 사이 한국은 오랜 전통의 김치를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기와 마케팅의 빈틈으로 문화 주도권을 빼앗길 위기에 놓여 있다.
문화 주권은 외교나 안보 못지않게 중요하다. 한국이 김치의 종주국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다음은 한복·한글·한식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
독일 마트의 ‘일본 김치’ 표기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문화가 외부 세력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현실적 경고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대응이다.
김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그 이름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문화 안보를 수호하는 일이며, 이는 모든 국민이 함께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다.
“김치는 한국의 것이다.” — 이 단순한 문장이 세계 어디서나 자명하게 들리도록, 한국 사회는 이제 문화주권의 새로운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